남이 쓴 좋은 글2010. 4. 22. 22:01

아내는 TV를 싫어한다. 남편이 TV 프로그램을 만들어 밥벌이를 하는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아내의 TV  혐오증은 이 정부의 좌파 혐오증을 능가한다. TV 코드는 항상 빠져 있으며 아이들이 자기 일과를 하고 있을 때 코드를 꽂기라도 하면 "지금 뭐하는 거야?" 하는 독오른 검사 뺨치는 심문쪼의 질문이 날아들기 일쑤다. 남편한테도 이러니 애들한테는 더 볼 것이 없다. 자기가 보고 싶은 프로그램이거나 교육상 좋다고 판단되는 다큐멘터리 정도 외에 아이들이 접근 가능한 프로그램은 많지 않다. 그 중의 하나가 '개그 콘서트'다. 



엄마의 TV 통제에 마지 못해 따르는 아이들이지만 개그콘서트를 못보게 한다면 당장 촛불 들고 마루에서 시위를 벌일 것이다. 사실 그럴 리도 없다. 아내 자신이 보고 즐기는 프로그램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아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서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하고서 응시할 때가 적지 않다. 아이들과 아내는 웃고 떠들지만 나는 자못 숙연하게 개콘을 지켜보곤 한다. <추적 60분>부터 시작하여 한국 시사 프로그램의 장구한 역사를 이어온 KBS에 남은 유일한 시사 프로그램이기 때문이다.  

시사라는 것이 별 것이 아니다. 한 시대의 세태를 반영하고 부족한 부분을 짚어내며 어긋난 부분에 일침을 가하고 직설 아니면 간접화법을 통해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에 호통을 쳐 대는 것, 그것이 시사 프로그램 아니겠는가. 적어도 오늘 한선교 의원님이 지적하신 대로 "김인규 사장님이 취임"하신 이래 KBS의 시사 프로그램이 어떤 식으로 '시사'를 구현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구태여 말하고 싶지 않다. 단지 똥무더기 속에 빛나는 다이아몬드같고 흙탕물 속에서 피어난 연꽃과 같은 시사 프로그램 '개그 콘서트'를 논할 뿐이다.  

"대학 등록금이 우리 아빠 혈압이야?"라고 동혁이 형이 부르짖었을 때 나는 태반이 대학생이었을 방청객들이 내지른 공감의 환호를 들으며 전율했다. 그건 슬랩스틱으로 치고 박고 넘어지는 풍경에 쏟아내는 웃음과는 다른 차원에 있었다. 화장실 가기 전 허리춤 붙잡고 바둥거리면서는 까짓거 반값으로 깎아 주겠다고 호언했다가 화장실 갔다 온 뒤에는 "등록금이 싸면 교육의 질이 떨어진다."고 눙치는 어떤 분께 가하는 통렬한 어퍼컷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당장 낼 모레 내야 할 자식 등록금을 고민하는 어떤 50대는 아니다 내 혈압은 강하제 먹으면 내려가는데 저놈의 등록금은 별 약을 쳐도 오르기만 한다고 땅을 치기도 하였을 것이다. 브라운관을 응시하는 국민들에게 대학 등록금 문제를 이렇게 쉽고 간단하게 전달하며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시키고 그 이권을 움켜쥐고 앉은 이들의 뺨을 갈기는 시사 프로그램을 나는 본 적이 없었다.   
 



김인규 사장님이 취임하신 이래 KBS 시사 프로그램의 종적이 바람과 함께 사라진 가운데 고군분투하던 개그콘서트는 당연히 < PD수첩>에 필적하는 탄압과 외풍에 시달려 왔다. <PD수첩>이 빨갱이라는 욕을 먹었다면 <개콘>의 동혁이 형은 무려 '포퓰리즘'이라는 유식한 비난을 들었다. <PD수첩>이 불편한 사람들과 동혁이 형이 보기가 싫었던 사람들은 사실상 동일인물들이다. 모름지기 방송 프로그램은 '정부의 시책에 맞게, 건전하고 건강한 내용을 전파'하여야 하고 "하늘엔 조각구름 떠 있고 강물엔 유람선이 떠 있어야" 하는데, 찧고 까불고 때리고 맞고 물 끼얹고 나자빠지는 코미디로도 충분히 웃음을 줄 수 있는데 건방지게 왜 시사를 논하느냐 말이다.  

한선교 의원의 발언은 그 불쾌감의 오르가즘을 구현한다. 그는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을 부르짖는 개콘을 두고 KBS 사장에게 항의했다. "어떻게 김 사장이 취임한 뒤로도 이런 프로그램이 나올 수 있느냐."는 항변은 유도탄처럼 정확하게 문제의 본질에 적중한다. 비포 김인규의 시대에는 가능했을지 모르겠지만 당신은 그런 프로그램 좀 관리감독하라고 회전의자 내 준 거 아니냐는 힐난인 셈이며,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따위의 한탄보다는 "1등을 존중하는 아름다운 세상"으로  승화시켜야 할 거 아니냐는 지적인 것이다. 하긴 한선교 의원님께서 방송 현장에 계실 때는 그런 프로그램들로 도배를 하고도 몇 자가 남긴 했다. 

하도 기가 막혀서 한선교 의원실에 전화를 드렸더니 "참 재미있는 프로그램이고 아이하고도 즐겨 보시는데 그런 부정적인 내용만 없으면 더 재미있겠다는 취지로 말씀하신 것"이라고 보좌관이 답한다. 무엇이 부정적일까.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 부정적인가. 아이들을 줄세워 등수매기기도 모자라 전국의 학교를 줄세우고 굳이 등수를 찍어서 너희들은 열등하다고 선언하겠다는 세상에서 그에 대한 한탄과 넋두리조차 '부정적'으로 들어야 하겠는가. 정히 그러하다면 시청자 게시판에 끄적이고 말 일이지, 방송사 사장을 불러 두고 당신 그 자리에서 뭐하는 거냐는 투로 묻는 것이 '전직 방송인'의 할 바란 말인가. 한선교 의원 자신이 토크쇼를 맡던 시절, 어느 여당 국회의원이 "왜 그런 초대손님을 초대했느냐?"고 사장을 불러 따진다면 그 목이 자라가 되지 않았겠는가. 그 얼굴에 핏기가 남아났겠는가. 허긴 어제 보좌관도 그러더라.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에 국회의원이 사장에게 한 마디 했다고 압력이 된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맞다. 시대는 바뀌었다. "김사장이 그 자리에 앉은" 시대가 되었지 않은가. 

존 스타인벡의 소설 "분노의 포도"가 나온 이후에 작가는 무한한 비난에 직면했다. 오클라호마 출신의 가난한 농부가 캘리포니아로 이주하면서 겪는 고충과 비애를 그린 이 소설이 이른바 빨갱이 소설이며, 현실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묘사하여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킨다는 진실로 친근한 내용의 비난이었다. 거기까지는 그렇다고 치는데 어떤 얼빠진 작가는 "환희의 포도"라는 소설을 썼다. 역시 중부에서 온 이주민들이 캘리포니아 농장주들의 따뜻한 환대를 받고 충만한 행복감 속에 정착하게 된다는 판타지 소설이었다. 어쩌면 한선교 의원은 그런 프로그램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1등을 존중하는 아름다운 세상", "누구나 노력하면 부자가 될 수 있는 세상",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건 될 수가 있는 세상"을 왜 노래하고 묘사하며 프로그램으로 녹여내지 못하는가를 발을 구르며 통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한선교 의원이 진행하던 인기 프로그램 중에 "그 사람 그 후"가 있었다. 참 재미있게 봤던 프로그램이고 개인적으로는 한선교라는 이름을 그때 처음으로 기억하게 해 준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추억 어린 사건 속의 인물들을 오랜만에 찾아가 그 변모된 모습을 들여다보고 함께 과거를 돌이키는 프로그램이었다. 앞으로 20년 뒤 유사한 프로그램이 생긴다면 한선교 의원도 유력한 출연자 리스트에 오를 지도 모른다. 한선교 의원의 이전 모습처럼 깔끔한 외모와 구수한 입담의 MC가 이렇게 오프닝을 치면서 프로그램을 열지도 모른다.  

"20년 전에 한 국회의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국회에서, 세상에 국회에서 공영방송사 사장을 불러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화면 보시죠. ( 한선교 발언 뒤 청중 웃음)


더 대단한 것은 이분이 방송에 문외한도 아니고 방송인 경력을 디딤돌 삼아서 국회에 입성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분의 발언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당시 공영 방송 KBS에 유일하게 남아 있던 시사 프로그램 "개그 콘서트"가 힘을 잃고 정말이지 '웃기고 자빠진' 프로그램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한선교 의원.  지금은 어디서 뭘 하고 계실까요. 찾아가 봤습니다."  

술 아니면 용기도 안나고, 술 한 잔의 호기가 아니면 부릴 데도 없는 대한민국, 술주정을 빙자해서 세상을 한 방 먹이는 그 소박한 시도에 재갈을 물리려는 국회의원 한선교. 제발 자중해 주시기 바란다. 그래도 명색이 공영방송 KBS에, (비록 공영의 탈을 쓴 귀족들이라 해도) 시사프로그램 하나는 명맥을 이어가게 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내 입으로 못내는 말, 브라운관을 통해서라도 들으며 깔깔대고 박수 칠 수 있는 자유 정도는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안 그렇습니까 한선교 의원 나리 


http://www.ddanzi.com/news/15264.html

Posted by 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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